에이비일팔공을 떠나며
7년 9개월 간의 여정을 마무리하며

7년 9개월 간의 여정을 마무리하며

17년 4월에 들어와 24년 12월에 정든 회사를 떠난다. 8년여의 긴 시간이었다. 마치 초등학교를 나와 중학교를 다니던 중에 전혀 모르는 지역으로 이사를 가는듯한 기분마저 든다. 작은 기대감,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불안과 두려움을 느낀다.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 때가 생각난다. 첫날인데 사수님이 생일 휴가라서 없다고 했다. 멍하니 앉아 주변을 바라봤는데, 무언가 사람들이 만들고자 하는 것을 진지하게 논의하고 빠르게 배포하는 모습을 보며, 어떻게든 같이 이뤄내보고 싶다는 생각이 막연하지만 들었다. 사실 그때의 나는 개발을 계속해서 피해왔기에 퍼블리싱을 제외한 프론트엔드는 하나도 몰랐다. 그러나 사수님의 도움을 받고, 코드를 읽고, 또 열심히(?) 터트려가며 1~2주가 지난 시점부터 바로 기능 개발에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만들어야 할 것이 많았고, 또 많은 것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늘어나고, 사무실을 옮기고, 시간이 흐르다보니 등을 맡기고 함께 일을 했던 동료들이 떠나고, 다시 팀을 만들어 움직이고… AB180에서의 마지막 2년은 거의 다른 팀과의 협업 체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데에 집중했던 것 같다. 조직이 커질수록 세일즈, CSM 등 다양한 파트가 생겨나지만 협업의 고리는 느슨해지기에 어떻게든 그 부분을 다잡고 싶었던 것 같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 “대체 어떻게 한 회사를 오랜 기간 다닐 수 있었나요?”
물론 여전히 나보다 오래 계신 분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야기를 해본다면, 딱히 오래 다녀야겠다는 비장한 각오 같은 것이 있던 것은 아니다. AB180에 들어오기 전에, 그러니까 막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어떻게든 입에 풀칠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주변의 도움으로 몇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컴퓨터 학원 선생님, 용접공, 법무팀 비서, 그리고 에이비일팔공의 개발자. 앞의 4개는 그래도 괜찮았지만 솔직히 개발자는 하기 싫었다. 그야 주변에 뚝딱하고 데이터베이스 같은 걸 만드는 사람, 1KB 단위로 메모리 최적화에 목을 메는 사람이 있으면, 나같은 사람이 개발자를 해도 되나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개발자를 고른 것은 찰나의 순간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것을 골라도 그 순간은 잠깐이고, 그 외에는 좋아하지 않는 것을 마주하고 견디는 시간이다. 만약 내가 그런 시간을 참고 견딜 수 있다면, 심지어 잘할 수 있게 된다면, 내가 어디에서 어떤 상황에 놓여도 잘 해낼 수 있다는 자기 증명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작정 하기 싫은 것만 한 것은 아니다. 8년을 다녔지만 실제로는 약 4~5개의 회사를 다녔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처음에는 얼렁뚱땅 기능을 찍어냈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디자인 시스템이나 유저 가이드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이후에는 성능 최적화나 안정성, 우리 회사의 구조나 역학을 보게 되었다. 그런 측면에서 같은 일을 쭉 해온 것이 아닌, 제가 원하는 바를 계속해서 각을 재고, 성취해내면서 오래 견딜 수 있었던 힘이 되었던 것 같다.
AB180에서 내가 가장 감사하게 느끼는 것은 좋은 분들이 곁에 많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진지하게 좋아하는 것, 잘하고 싶은 것을 이야기할 사람을 찾는다고 하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오히려 비웃음을 살 때도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다같이 모여 같이 합을 맞춰갈 수 있던 것은 천운이나 축복 받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수치로 표현해볼 수도 있겠다. 좋은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50% 정도로 치고, 좋은 기회가 있을 가능성을 20%로 치고, 5년 이상된 중소기업의 생존 확률은 30%이다. 나는 우리가 3% 정도의 팀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감사한 마음이 가득하다.
내가 떠나는 이후에도 AB180이 좋은 회사, 좋은 사람들이 가득한 곳으로 남아있길 바란다. 퇴사 이후에는 지우고 싶어도 내게서 ‘AB180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뗄 수 없을 것이다. 혹 회사가 이상해져 업계에서 소문이 나면 아무리 제가 ‘내가 있었을 때는 멀쩡했는데’라고 말해도 딱히 사람들은 믿지 않을 테니까.
퇴사 이후에 바로 작은 스타트업에 공동창업자로 합류하려고 한다. 창업 전선에 합류할 생각은 원래 추호도 없었지만, 몇 가지 생각의 전환이 있었다. 7~8년 전에 내가 피했던 선택을 골랐을 때 고르지 않았다면 절대 알 수 없었던 새로운 기회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또한 꾸준히 나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병목을 마주치며 관성에서 계속 벗어나야한다. 마지막으로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AB180의 대표인 성필님이 AB180을 창업한 나이가 지금 내 나이 즈음이라는 점. 나도 이런 회사를 만들고 키울 수 있을까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이 있다.
평균적으로 회사가 1년 안에 망할 확률이 60% 선이니, 커리어를 1년 정도 버린다고 생각하려고 한다. 그래서 회사가 망해서 다시 추하게 AB180에 받아들여달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AB180이 ‘당신보다 잘하는 사람이 많아서 사양할게요’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길 바란다. 마냥 씁쓸하지만은 않을 테니까.
처음에 10명 있던 사당역 오렌지팜 105호에서 강남역 두 층 짜리 건물이 되기까지 좋은 분들과 좋은 여정을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감사했고, 언젠가 또 어디선가 다시 만날 수 있기를.